아무르 (2012)
영화는 보통 정신적인 작용이 중심이 된다.
모든 것을 의자에 앉아 눈과 귀로 받아들이고 머리로 판단한다.
근래엔 4D니 이런 이상한 것도 있지만...서도
일단은 간접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가끔 경험되는 영화도 있다.
그자리에서 스크린의 배우들과 함께 그 자리를 묵묵하게 지켜줘야 하는 영화도 있다.
가령 '남영동' 같은 영화가 그러하다.
내가 고문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목격'하고 있다.
행동과 발언을 통제당한채 바라봐야 한다.
카메라는 항상 두 사람의 곁에 있다.
보통 아픈사람을 문병갔을 때
환자에 수족처럼 붙어 있는 간병인과 환자를 함께 볼 수 있는
애매한 위치에 방문자는 자리한다.
가끔 환자 곁에서 손을 잡아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곁에는 간병인이 있다.
문병간 병원, 혹은 가정에 멋적게 서서 2시간동안
환자와 간병인 두 사람을 지켜보다 오는 것이 문병이다.
5년 정도 전에 아내와 함께
노망든 고모부를 만나러 간적 있다.
노망 고모부는 내 아내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하며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가서
읽을만한 책 두권을 선물해줬다.
"우리집엔 항상 책이 와... 몇권 가져가.."
그러면서 GS 홈쇼핑과 농수산 홈쇼핑의 책자 두개를 선물로 주셨다.
영화 '아무르'는
문병 가는 영화다.
그러나 문병 간 그 집에서 우리는
질병의 이면과
늙음의 안타까움과
마르지 않는 그러나 텁텁해진 사랑을 본다.
2시간동안
젊음과 빠름의 시간은 정지하고
늙음과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시간으로 대치되고
한없이 느린 숨결과 대사로
그들 사이에 깊숙하게 자리잡게 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이전에
'영화는 되도록 컷을 나누지 않는 것이 좋다.'
'시퀜스의 감정이 끊어지게 되므로 되로독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다만, 그렇게 다 보여주면 너무 지루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생략하는 편집만이 필요하다.'
라고 '봉인된 시간'에서 장황하게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영화가 딱 그렇다.
영화는 시종일관 같은 톤으로 같은 호흡으로 진행되고
다만 시간적인 생략만이 있을 뿐이다.
발단, 전개, 위기, 머 이런거 전혀 없다.
그냥 삶을 뚝 떼어 내어 보여줄 뿐이다.
딱 10번이다.
하품이 난 횟수는.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이 급해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자마자 뛰어 나왔다.
출입문 바로 앞에 저 포스터가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저 노인들의 병문안에 인사도 하지 않고 나왔다는 자책감과
두 사람의 삶의 무게를 갑자기 느끼게 되었다.
왜 영화를 볼 땐 무덤덤했으나
뒤돌아 나오는 문앞에서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뒷목이 서늘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냥 안타깝고 무서운 기분이 든다.
'경험'으로서의 영화 한편이다.
'오락', '재미', '감동' 이 아니라
그냥 '경험'이다.